지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사회에서,
동화와 상상이란
철 지난 시대의 부산물,
천덕꾸러기처럼 취급되곤 합니다.
아직도 아이 같은
상상을 하고 있느냐고,
아직도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느냐고,
핀잔 듣는
우리 마음속엔
어려운 마음이 가득해집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이 질문에 필요한 건
논리적 지성과 사고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왜 닭이 있을까에 대한 답변은
상상으로만 가능합니다.
새벽녘
동이 터오르는 광경 속에
우리가 담아내는 경탄은
설명보다는 상상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살다 보니 그렇습니다.
끌리는 그 사람에게는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끌림 속엔
예상되지 않는 대화와
상상을 자극하는 그의 행동이 있습니다.
매력까지도
점수로 환산하고 싶어하는 이 세대에,
누군가에게 끌리는 그 감정까지
점수화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지성의 체계가 아닙니다.
상상의 체계입니다.
고도로 체계화된
율법 점수 측정표와
자기 만족 안에서
그 어떤 상상도 배제하는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비방했습니다.
저 녀석은
세리와 창기들과 논다.
틀을 너무 벗어난다.
그들이 만든 틀로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그 신성 가득한 아들의 행동을
특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 넘어
분명하게 존재한 그것은
역설적으로 참 진리였습니다.
경외란 신비요
상상의 영역입니다.
지성의 체계를 뛰어넘습니다.
인간이 만든 틀로
신앙과 믿음을 측정하는 순간
경외와 신비는 사라집니다.
경외 없이
우리는 점점 메말라갑니다.
오늘도 설명되지 않는
그의 행동을 보며
여전히 점수를 매기는 우리.
새로운 기쁨을 상실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건 더 큰 열심이 아니라,
즐거운 상상력
그리고 사랑의 마음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가지셨던
틀을 넘는 그 사랑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