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궤멸되기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는, 남유다의 암울한 상황. 남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조용히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사자를 보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이 성에 대하여서, 그리고 나에 대하여서 어떤 말씀을 주시더냐?”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왕에게 가감 없이 전합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라. 그리하면 너와 네 자손이 살 것이다. 그것이 너가 유일하게 살 길이다.” 하나님의 처분 가운데 네 몸을 맡기라는 말이 왕인 시드기야를 향해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말이었습니다. 불안감 속에서 예레미야에게 소망의 말을 듣고 싶었던 왕은, 실망 속에서 이런 답변으로 그의 제안을(하나님 말씀을) 거부합니다. 이미 바벨론에 끌려간 유대인들에 의해 조롱당할까 두렵노라(렘 38:19)
시드기야에게 제 1정체성은 왕으로서의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몸을 맡기기에는 그의 제 1정체성, 곧 왕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생에 가장 소중한 그 왕의 자리와, 왕으로서의 위신이라는 정체성이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드기야가 남 유다의 왕으로서 온전히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고 나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그 앞에 나오기를 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주춤합니다.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졌기 때문에 주춤했습니다.
사무엘서에 나오는 사울왕도 그랬습니다. 가졌기 때문에 주춤했습니다. 왕이 되고 나서 그가 신경쓰는 것은 왕으로서의 위신과, 왕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도 그가 신경쓰는 것은, 사무엘에게 한 말(사무엘상 15:30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직 사람들 앞에 왕으로 선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묵상하며,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어떤 정체성이나 의로움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주님의 자녀로서 주가 주신 의로움을 받는 것 외에, 나머지는 다 헛된 것임을 인정하는 일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때로 우리도 가진 것으로 인해 주춤하게 됩니다. 이미 가진 정체성, 이뤄낸 정체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나의 제일 중요한 정체성이 하나님 앞에 선 자녀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내가 이뤄낸 것들, 세상이 인정해주는 자리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시드기야가 사는 방법은, 주신 말씀 가운데 가진 정체성을 뒤로하고 주의 처분 앞에 항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 주시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손에 붙든 정체성(내가 하는 일, 내가 가진 것, 나를 향한 평가)들 내려 놓고 주께로 나아오라, 주가 행하신 일 가운데 몸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붙드는 자로 서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떤 정체성을 내세우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제 1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들과 저의 인생이 악하고 날 것 그대로인 우리 인생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 사랑 가운데 든든히 서 있는 일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