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짝 자극적인 오늘 칼럼의 제목은 주간 설교 중에 받은 한 인사이트를 기록하기 위해 만든 제목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어떠한 선과 기준, 도덕적인 규칙들을 전제합니다.
그러한 절대 선에 대하여 각 종교마다 접근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신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특별한 노력이나 공로를 통해 조금 더 나은 입지를 사후에 얻을 수 있다는 생각.
모두가 비슷한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전제는 바로 인간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 관점은 바로 인생에게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절대적인 선 앞에서 인생들은 결국 절망을 느낍니다.
왜입니까? 지킬 수 없어서입니다.
살인하지 않았을지는 모르나 마음에 증오가 가득한 나를,
간음하지 않았을지는 모르나 마음에 음욕이 가득한 나를,
레이저보다도 더 선명하게 나를 비추시는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율법, 그리고 선의 기준 앞에 그 법은 우리에게 유죄 판결을 내립니다.
그 죄의 대가는 죽음, 곧 사망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예수님은 이 심판에 관하여 특별한 말을 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죽음을 요구하는 율법의 판결 앞에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죽음, 내 목숨으로 주겠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목숨이 너무 특별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으신 무죄한 자의 목숨이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율법의 정죄에 맞서고도 남을 죽음, 그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킨 죽음이었습니다.
여기서 Paid in full, 곧 완전 지불이 이루어집니다.
죽음을 달라는 율법 앞에 넘치도록 충분한 죽음을 주어 율법의 주장이 힘을 잃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버스에 함께 탑승하게 됩니다.
더 이상 법이 나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게 오늘 제목의 의미입니다.
죽음을 요구하는 율법 앞에 예수님이 하신 말.
그래, 죽으면 되잖아.
이 기이한 신적 존재의 죽음 앞에 죽음이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할 말 잃은 죽음 앞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전 것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의 주인 되어주심으로 그와 동행하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오늘도 그와 함께 사시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이 말씀과 같이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어떠한 선과 기준, 도덕적인 규칙들을 전제합니다.
그러한 절대 선에 대하여 각 종교마다 접근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신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특별한 노력이나 공로를 통해 조금 더 나은 입지를 사후에 얻을 수 있다는 생각.
모두가 비슷한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전제는 바로 인간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 관점은 바로 인생에게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절대적인 선 앞에서 인생들은 결국 절망을 느낍니다.
왜입니까? 지킬 수 없어서입니다.
살인하지 않았을지는 모르나 마음에 증오가 가득한 나를,
간음하지 않았을지는 모르나 마음에 음욕이 가득한 나를,
레이저보다도 더 선명하게 나를 비추시는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율법, 그리고 선의 기준 앞에 그 법은 우리에게 유죄 판결을 내립니다.
그 죄의 대가는 죽음, 곧 사망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예수님은 이 심판에 관하여 특별한 말을 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죽음을 요구하는 율법의 판결 앞에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죽음, 내 목숨으로 주겠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목숨이 너무 특별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으신 무죄한 자의 목숨이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율법의 정죄에 맞서고도 남을 죽음, 그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킨 죽음이었습니다.
여기서 Paid in full, 곧 완전 지불이 이루어집니다.
죽음을 달라는 율법 앞에 넘치도록 충분한 죽음을 주어 율법의 주장이 힘을 잃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버스에 함께 탑승하게 됩니다.
더 이상 법이 나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게 오늘 제목의 의미입니다.
죽음을 요구하는 율법 앞에 예수님이 하신 말.
그래, 죽으면 되잖아.
이 기이한 신적 존재의 죽음 앞에 죽음이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할 말 잃은 죽음 앞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전 것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의 주인 되어주심으로 그와 동행하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오늘도 그와 함께 사시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이 말씀과 같이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