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조합하며
스스로 만든 상상 속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3주 전 설교를 통해
저는 그런 삶을
소설 쓰는 삶이라고 부른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회차 설교에서
저는 사랑은 설명하는 것 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떳떳하고 괜찮을지 몰라도
함께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그들의 삶을
다시 살아나가게 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는 것,
그것이 곧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2회의 설교를 하고 보니
두 가지 명제가 함께
제 머릿속에서 겹치는 걸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설 쓰지 않으려면
설명해야 하고,
설명하면
소설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느 순간
지나가는 내 친구의 다른 안색을 보며
우리는 소설을 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소설 쓰는 사람만 비방하는 건
공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안색을 가진 친구의
배려 없음이
그 안에 들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대면하여 소통하고
풀어가는 대신에
차가운 낯빛으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로 결단하면(설명하지 않기로 했다면)
그건
상대방에게
끊임없는 소설 소재를 제공하는 겁니다.
때로 어떤 사람은,
그러라고 일부러,
냉랭한 외면을 복수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소설 쓰는 당사자만이
소설 쓰지 않는 노력을 해야 할 게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교제하며 설명할 사랑의 의무가
함께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연속된 두 회차의 설교를 통해
분명해진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살다 보니
제일 쉬운 것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 그렇게 살지 마”라고
책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일 어려운 것 하나 있습니다.
먼저 살아내는 겁니다.
소설 쓰는 사람,
설명 없는 사람.
둘 중에 누가 먼저 나아가야 할까요?
소설 안 쓰는 게 먼저일까요?
설명해주는 게 먼저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둘 중에 성숙한 사람이 먼저
살아내는 겁니다.
소설 쓰지 않고
내 삶을 사는 것이고,
외면하지 않고
소통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함께하는 겁니다.
소설 쓰지 말라고 하는 대신
설명해주는 우리 청년들이 되길,
설명하라고 하는 대신
내 삶 살아내는 우리 청년들이 되길,
그리고 제가 되길
소원하며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