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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람들 모임 둘!

    ‘예람들’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예수님 안에 하나 되는 모임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모임입니다.

     

    둘째 모임은 2013년 1월 20일 오후 5시에 파리바게뜨 2층 세미나실에서 가졌습니다. 모임을 여는 주제는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였습니다. 저, 교리, 바울이, 서린이, 요한이, 용범이, 원주, 자연이, 찬송이, 하은이 이렇게 10명이 모였습니다.

     

    아래는 모임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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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모임에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추구해야 할 가치라는 것, 그것을 정확하게 알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뿐이라는 것, ‘은혜’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다 주셨으며(이것이 복음입니다!) ‘믿음’은 한 번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은 것뿐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성경에 근거하는데, 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우리의 신앙과 직결됩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본질과 비본질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첫 모임에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서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은 그 사람이 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르듯,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아는 데 있어 그 사람에 관한 지식(knowledge about)이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을 아는 지식(knowledge of)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를테면 프로파일입니다. 이름, 나이, 성별, 사는 곳, 생년월일, 성적 등등이지요. 두 번째는 그 사람의 가치관, 세계관, 성격, 그 사람이 가진 삶의 목적과 철학 등등입니다. 물론 이 둘은 칼로 자르듯 완전히 별개로 존재할 수는 없지만, 첫째 지식만 알고 둘째 지식을 모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에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 등등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아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전능함과 한없는 지혜와 변함없는 신실함을 가지고 대체 우리에게, 좁혀서는 나에게 어떤 마음과 계획을 품고 계시는지 모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성경을 이해할 때도 같은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라는 것은 여러분 모두가 상태가 아닌 방향성으로, 기능이 아닌 본질로, 외모가 아닌 중심으로(삼상 16: 7), 육이 아닌 영(요한 6: 63)으로 예수님을 바로 알고 깊이 만나 그분의 마음(본질)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삼는 것(이것이 믿음입니다!)입니다. 그래서 예람들 모임이든 QT든 기도이든 설교든 끝난 후가 진짜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처럼(요 14: 6),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 39)

     

    이것은 신학이 아니라, 성경이 기록하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이란 곧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도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모든 성경(모세의 글, 선지자의 글, 시편)에 자기에 관한 것을 알려주십니다. 물론 여기에서 성경은 구약을 뜻합니다. 그러나 신약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하는 네 복음서, 성령(예수님의 영)을 받은 예수님의 사람들(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 이야기, 또 그 과정에서 예수님을 더 잘 전하려고 쓴 편지들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아예 첫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온통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그런데 만약 성경의 핵심이신 예수님을 빼놓고 성경을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다음의 목록을 보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까?

     

    1. Mozart

    2. Schubert

    3. Gold

    4. Spark

    5. Mondrian

    6. Radar

    7. Eternity

    8. Titan

    9. Accord

    10. Rio

     

    위 목록은 실제 모 회사에서 2012년 출시한 스마트폰의 한 종류를 시간순으로 정리한 별칭 목록입니다. 제목 1줄을 모르면 나머지 10줄을 다 읽어도 모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핵심과 본질이신 예수님을 모르면, 성경을 많이 읽었어도 하나님의 진리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냉장고를 사고 설명서를 보면서 철자나 수사법은 따지면서 정작 냉장고 사용법은 모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온갖 우리의 생각이 섞이면서 하나님을 멋대로 만들어서 믿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일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어 하던 율법학자들과 성경기록관들이 그랬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 23)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행위로 ‘하라’와 ‘하지 마라’만 빼어내어 강조하고, 그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사람을 괴롭히는 악신처럼 하나님을 만들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혼자 힘으로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벗어나서 나의 완전한 기준에 이르려는 것은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란다. 그러나 나는 악하고 불의한 자라도 내게 돌아오기만 하면 나는 너그럽게 용서하고 불쌍히 여겨 함께할 거야.’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 그리고 여러 대언자를 통해 그것을 알리시다가 마침내는 아들을 보내어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하나님 그분 자신이 오셨던 예수님은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 55: 7~9)

     

    그런데 이 모습은 우리 가운데도 있습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가 조금 있고 어떠한 것을 조금 깨달았다고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판단해 버립니다. 예수님의 피묻은 복음보다는 내 자아실현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망이 있는 것은 누구라도 지금의 상태가 어떻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 중심으로 뜯어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모양과 행위가 아닌 중심과 원리가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흔히 예수님의 사역을 가르치고, 고치고, 선포하신 세 가지로 곧잘 정리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알고 본질을 모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을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항상 자신이 중심이셔서, 언제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나 ‘예수님’이 누구이신지가 나옵니다. ‘나를 믿느냐’는 말씀이 수두룩하게 나오고, ‘나는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과 함께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으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과 함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전파하신 것도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전파하셨습니다. ‘복음’이란 바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진리이며, ‘천국’이란 곧 그분을 우리가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통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시다가 바로 그 일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공부하고 있습니까? 정리하겠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중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 우리에게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참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이라고 종말론이 주가 될 것이 아니며, 잠언이라고 도덕적 교훈이 주가 될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잠 30: 4)

     

    이렇듯 그 아들의 이름을 알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지식의 근본이며,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입니다. 성경의 어느 부분이라도 예수님의 피묻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하는 성경 해석은 제아무리 심오하고 기발해도 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성화의 구원도 오직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는 의지나 노력이 아닙니다. 구약에도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신 1:3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시기 전에 먼저 다 이루셨습니다.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힘을 다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다하고 하나님의 목숨을 다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하여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확정되었습니다(롬 5: 8). 신약에도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 9~1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 19)’라고 기록합니다. 우리에게 ‘모든 소유를 다 팔아 천국을 사라’ 하시기 전에 생명을 팔아 그 피 값으로 먼저 우리를 사신 예수님을 기억할 때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결코 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먼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모든 방법은 짐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 3: 16, 벧후 1: 21)으로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닙니다(벧후 1: 20).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할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해석은 정확하여서 나의 생명을 걸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깨달음이 왔으면 그것이 성령에 따른 감동인지 자세히 살펴 확인할 것입니다. 성경은 그 방법까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일 4: 1~3)

     

    예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되, 우리 안에 오셔서 그분을 주요 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는 영이라면(고전 12: 3) 곧 하나님께 속한 영이며,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영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중간이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6: 24, 눅 16: 13)처럼, 어떤 영이든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거나 그렇지 않고 이를테면 욕심에 따라 재물을 주로 인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하시는 일에 관해 바로 자신 곧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하셨으며(요 15:26),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요 16: 14~15)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에 따른 해석이란 예수님 중심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중심으로 살도록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 성령이 곧 예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행 16: 6~7). 앞서 말한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하고 예수님 중심으로 적용하라는 이야기와 같은 말이지만 굳이 언급한 것은 사도 요한이 위 말씀에 쓴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것을 주인으로 인정하게끔 하려는 것으로 가득하므로 순결하면서도 지혜롭게 늘 분별하고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영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면 곧바로 이상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딱 잘라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를테면 예수님을 1등에 모시지 않고 2등에 두는 것, 이러한 것을 제일 경계해야 합니다. 원래 잘 만들어진 거짓말일수록 진실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혹 내가 예수님을 1등으로 모시지 않고 있는 영역이 없나 살펴야 합니다. 그런 곳이 제일 악한 영이 틈타기 쉬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끊임없이 의사소통하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은 주 안의 다른 형제 안에 계신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알고 교제해야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깊은 기도 가운데 자신의 마음이 예수님 마음을 따라가도록, 즉 성령의 감동에 민감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말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으로 내 안을 채우는 것, 즉 듣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그것이 상투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아니고서는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믿으며 예수님 은혜 안에 깊이 잠기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나 같은 사람한테도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해주세요.’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깨달아 예수님을 내 삶에서 더 깊이 만나도록 해주세요.’

    ‘사랑하는 형제와 말씀을 나눌 때 더 풍성하고 분명히 드러나실 예수님을 기대합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기도를 기뻐하시며 지혜가 필요하다면 후히 주실 것입니다(약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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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쓰면서 왠지 많이 울었습니다. ‘예람들’에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시면 주저 없이 말해주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