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희년에 풀려나는 것은 땅 뿐만이 아닙니다.
종들도 풀려납니다.
이스라엘은 희년의 때에 경제적인 속박에서 종들이 자유케 하는 기쁨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경제적인 논리가 아닌 사랑의 논리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경제적인 이익이 있으면 멈출줄을 모르고 달려가는 속성이 있지만,
하나님은 50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희년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이 이와 다르며,
그의 이름이 왜 사랑의 하나님이신지를 알려줍니다.
그런데 희년 외에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속량입니다.
하나님은 희년 전에 ‘속량’이라는 제도를 통해 친족들에게 종으로 팔린 자들을 풀어주게 할 의무를 부여하십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종이 되어 버린 친척을 눈감고 넘어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정을 아는 자들이 먼저 나아가 사랑을 베풀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고통에 처해 있는 자들이 있을때, 나아가서 어려움을 해결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손을 대신하여, 우리가 어려운 자들을 도울 마땅한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베풀때 주의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0 자기 몸이 팔린 해로부터 희년까지를 그 산 자와 계산하여 그 연수를 따라서 그 몸의 값을 정할 때에 그 사람을 섬긴 날을 그 사람에게 고용된 날로 여길 것이라
51 만일 남은 해가 많으면 그 연수대로 팔린 값에서 속량하는 값을 그 사람에게 도로 주고
52 만일 희년까지 남은 해가 적으면 그 사람과 계산하여 그 연수대로 속량하는 그 값을 그에게 도로 줄지며
레위기 25장 50절부터 52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종의 주인을 억압하여, 종을 풀어내는 것을 방지하게 하십니다.
속량을 할 때에는 정확하게 희년에서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여
주인이 마땅히 누릴 가능성이 있는 가치를 정확하게 배상하여야만 종을 풀어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신 공의의 하나님이신 것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어째서 심판이 있냐고 물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질서 없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 할때
도리어 종을 가진 주인은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마땅하게 지켜져야할 질서가 파괴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친족을 속량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이
그 속량할 종의 가치에 합당한 대가를 주인에게 지불할때에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나의 것을 내어주는 희생을 필요로 하고
그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 오래 참음을 필요로 하며
무질서함이 아닌 질서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십자가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그 원칙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죄를 짓고 죄의 종이 되어 버린 인간의 최후는
사망이 아니고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철저하게 지키시는 ‘공의’
즉 누군가를 희생 시켜야만 한다는 그 사실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십니다.
그럼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사망이라는 대가를 치루게 할 대상이
죄를 지은 우리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우리가 잘 아는,
죄가 없으신 성자 예수에 의하여 치루어 졌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사망이라는 삯을 치루게 하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은
심판의 대상을 십자가에서 자기의 아들 그리스도에게 돌려서 죽게 하심으로
십자가 안에서 그의 공의와 사랑의 완벽한 조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그분은 공의로우신 그분의 속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놓는 희생을 감수 하셔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
자기의 아들을 희생시키까지 하면서 지키고자 하였던 공의 안에서의 사랑.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 이 진리를 깨닫게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