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비전을 말할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시적인 어떤 관점에서의
사명들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꿈들을
잘 풀어내서 표현하고
잘 말하는 사람들을 보며
멋지다고 생각하고, 부러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상 생각하는
그 비전이라는 단어 안에는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리고
내 이름이
위대해지려하는 것이
비전이 될수 있다는 것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위대해지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들의 욕망이었습니다.
위대해지고 싶은 나의 비전은
큰 건물을 쌓아올리는 것,
큰 사업을 일으키는 것.
큰 숫자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 등.
가시적인 어떤 결과물과
양적 성장으로 표현되어 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그리고 그것을 무너뜨린 하나님의 이야기는
그저 옛날 이야기가 아닌 것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위대해지라는 명령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저 주님 앞에
온전한 자로 서기를 힘쓰라는 말
거룩한 자로 서기를 힘쓰라는 말
순결한 자로 서기를 힘쓰라는 말이 성경에 가득할 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편 말씀입니니다.
[시131:1-3]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편의 기자가
고백하는 것, 무엇입니까?
우리 시대의 문화가 주는 메시지와
정반대되는 메시지입니다.
그는,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1절)
세상은 위대해지라 하지만
시편의 기자는
그저 주 품 안에서 온전한 평안을 누리기를
추구합니다. (2절)
그의 기도는
내 야망과 소망을 이루기 위한
목적을 위한 수단적 기도가 아닌,
고요하고 평온하게
그의 품에 거하기를
바꿔 말해
주님으로만 충분하다는
그 확신을 더하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3절)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역설적으로
비전은,그때 나옵니다.
젖 뗀 아이가
어미의 품안에서
평안하게 있을 그때,
우리 눈에는 그런 평안을, 그 샬롬을 누리지 못하는
세상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
시야 곧 비전이 생깁니다
그 비전
곧 샬롬을 누리지 못하는 이 세상을,
회복시키고 싶은 열망과 소망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꿈이요
열정이요 비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천에게 비전이란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회복에 대한 갈망으로 표현되어집니다.
그리고,
비전을 이루며 나아갈수록
그리운 하나님 품을 더 갈망하는
곧 내가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더 간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당신의 비전은 어디있습니까.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