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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람들(예수님의 사람들)’ 모임 셋!

    ‘예람들’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예수님 안에 하나 되는 모임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모임입니다^^

     

    셋째 모임은 2013년 1월 27일 오후 5시에 파리바게뜨 2층 세미나실에서 가졌습니다. 모임을 여는 주제는 ‘은혜’였습니다. 저, 교리, 바울이, 보건이, 보영이, 서린이, 요한이, 용범이, 원주, 자연이, 찬송이, 하은이, 한나 이렇게 13명이 모였습니다.

     

    아래는 모임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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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모임에서는 특별히 ‘은혜’에 나누고자 합니다. 은혜는 잘 알고 있듯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째 시간에 나눈 것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알리셨고, 둘째 시간에 나눈 것처럼 성경은 그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격 없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셨고(롬 5: 8), 다시 살아나심으로 모든 사람의 소망이 되셨으며, 하늘에 오르신 후에는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 안에서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무얼 하든지, 이 은혜는 나를 다시 사로잡아 하나님께로 돌이키며, 우리의 온갖 오류와 잘못과 죄의 당연한 결과로서 받게 될 심판과 죽음에서부터 우리를 해방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놀랍고도 기쁜 소식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 은혜의 복된 소식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머릿속에서 지적인 동의만 하는 차가운 복음이 아니라, 가슴 저미는 내 모든 것의 온전한 받아들임, 곧 믿음으로써 대할 것입니다. 감정으로 만도 아니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내 삶의 방향성의 변화가 일어나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향해 달음질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함으로써 우리를 강력하게 그 은혜 안으로 초청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18절을 통해 다시 한번 그 예수님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먼저 요한복음은 별명이 하나 있는데, ‘독수리의 복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박이삭 목사님은 성경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창세기의 내용을 모르면 영화의 처음 15분을 놓치는 것과 같고,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모르면 마지막 15분을 놓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습니다. 복음서를 모르면 영화의 절정과 중요장면들을 놓치는 것이라고요.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관한 책인데, 그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생생한 기록을 놓쳐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4권의 복음서 중 요한복음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같은 관점으로 기록한 복음서’라는 말인데, 어느 관점이냐면 곧 ‘사람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보니 알고 보니 그분은 하나님이셨다!’, 곧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조금 다릅니다. 마치 독수리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처음부터 선포하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그 부분이 1장 1절에서 18절인데, 네 복음서는 성경 전체의 요약이라 할 수 있고, 요한복음은 네 복음서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 부분은 요한복음의 요약이 되어서 곧 성경 전체의 요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처음 부분을 읽어 보면 ‘말씀’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로고스’로, 단순히 언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불변하는 진리로서 당시 헬라 철학에서 잘 사용되던 개념입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늘 변화하지만, 그러한 변화를 보고 우리가 사고하는 세계(이데아)에 불변하는 로고스가 있다. 그런데 어쩌면 (생각으로 추측하는 방식이 아니라) 로고스가 직접 우리에게 올 수도 있을 것이고, 그때는 우리가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진리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말아야 진리이므로 당연히 영원한 진리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있게 한 진리이므로 인격과 의지를 갖추고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 이 진리가 먼저 있고 보이는 세계는 나중에 생겼으므로 플라톤은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도 했습니다. 중국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태초유도(太初有道)’, 즉 ‘태초에 도(道)가 있었다’고 번역했는데, 동양 철학에서 도(道)가 단순히 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불변하는 진리를 뜻하는 말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 곧 로고스는 태초부터 있었고, 하나님, 곧 신과 함께이며, 곧 그 하나님이라고 요한복음은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말씀으로 모든 것이 지어졌고, 지어진 것 중 어떤 것도 말씀 없이 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14절에 나오지만 바로 육신이 되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며 또한 창조주이시라는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었으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합니다. 진리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질 생명이 있습니다. 진짜를 알면 진짜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생명은 사람들을 깨닫게(enlighten) 하는 빛이자, 모든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빛입니다. 이 진리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는데,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분의 증언과 가르침, 여러 기적을 비롯한 그분의 삶,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기만 하면, 다른 말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권세가 있습니다! 자녀이면 상속자(롬 8: 17, 갈 4: 7)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거저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너를 지으신 창조주이셔. 그분을 믿기만 하면 넌 정말 사는 것처럼 살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것을 받아 누릴 권세를 얻는단다.” 이보다 강력한 초청이 또 있을까요!

     

    우리가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니까 그 영광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로 꽉 차 있다는 증언이 이어집니다. 요한(사도 요한이 아닌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은 잠잠히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외쳐 증거합니다. 저분은 나보다 후에 태어났지만 나보다 먼저, 태초부터 계신 분이며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그분 안에 꽉 차 있는 은혜와 진리에서 받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유일하게 낳은 아드님(the only begotten Son)’이라는 말을 한자로 옮긴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둘 다 ‘낳다’이지만, 성경의 족보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는 begot으로 아버지에게서 온 관계를 뜻하며, 생물학적으로 어머니 몸에서 태어난 것은 born을 씁니다. 즉, 예수님은 2,000여 년 전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지만(born), 그보다 훨씬 전인 영원부터 하나님의 본체로서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라는 말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사람으로 태어나신 하나님의 본체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떤 마음으로 대해 주시는지를 보면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마음으로 대해 주시는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 30)”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말을 듣고 신성모독으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던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였으나, 그것을 받아들이지(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 10: 22~33)

     

    만약 예수님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지 않고 심판과 정죄가 충만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누구를 미워하면 곧 살인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박이삭 목사님이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행위로 이룰 수 있다고 여겼던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를 사정없이 집행하시면서 우리를 향해 자비와 긍휼이 없으셨다면 우리는 이미 다 죽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은혜 위의 은혜이십니다. 은혜가 한이 없다 못해,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분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하나님의 공의가 없으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이시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는데 그 둘을 다른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공의라는 말은 말 그대로 ‘함께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 자신과 함께하기 위해, 그러는 데에 필요한 기준을 제시하신 것이 율법입니다. 자기 입맛에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려면 당연한 기준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격이 없는 우리와 함께하시고자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을까요? 오직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와 화목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자신의 영 성령을 주신 하나님,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믿음뿐입니다. 다시 말해 공의란 사랑의 ‘진리’이며 함께하고자 하는 사랑이 없는 공의는 아예 공의가 되지 못합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께서는 같은 사랑이십니다. 구약에서도 악인이라도 돌이키면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신약에서도 마음으로만 미워해도 이미 살인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은혜와 진리(공의)가 모두 있어야 하며, 이 둘은 예수님에게서 온전히 주어졌습니다.

     

    복음은 슬픈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 나를 보았을 때, 그 의에 갈급하여 하나님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영이 가난한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세리’라고 쓰지만, 그 말은 세무서 직원 같은 무난한 직업이 아니라 로마의 지배 아래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일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우리나라로 치면 친일파 매국노와 같은 개념으로 몸을 파는 창녀와 함께 가장 인간 말종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정에서 세리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세리를 소개합니다. 성전 안에 감히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밖에서 서성이며 바라보고 자신의 가슴을 치며 그저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울었던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을 보며 성전 안에서 “나는 저 인간말종과는 다릅니다. 십일조며 금식이며 빠짐없이 드립니다.”라고 기도한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하시며 과부의 두 렙돈을 부자가 헌금함에 쏟아 넣은 많은 돈보다도 크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 것, 그것 외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은혜를 더 경험하기 위해 죄를 더 지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하게 나를 사랑하셨는데, 그 증거인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나는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더 사랑했던 것, 오직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살면서 그 사랑을 전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줄을 알고도 하지 않은 것(약 4: 17), 나아가서는 믿음으로 하지 않은 모든 것이 죄입니다(롬 14: 23). 예수님의 은혜에 푹 젖어 매일매일 순간순간 사는 기쁨이 예람들 모두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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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임에서 각자 받은 은혜의 이야기들은 개인적인 것도 있고 분량이 많아 옮기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예람들 모임 동안 자신이 받은 은혜로 예수님을 자랑하는 시간을 늘리고자 합니다. ‘예람들’에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시면 주저 없이 말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