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미얀마로 향하는 청년들의 마음이 뛰고 있습니다.
인도차이나반도 서쪽에 위치한 나라…
‘미얀마’ 이전의 이름은 ‘버마’였습니다. 왜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뀌었을까요?
어느날 갑지가 국가 명칭이 바뀐 것입니다.
인터넷을 보니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버마에서 1962년부터 지배해온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1988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88년 8월 8일, 10만명 이상의 시민과 학생, 종교인들이 참여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였습니다.
온 나라가 민주화 열망에 가득하여 군사압제에 대항항여 일어난 혁명적 상황이라고 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이 항쟁이 채 결실을 맺기도 전에, 서마웅 장군을 위시한 신군부가 구테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대대적인 강경 진합을 계속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소 2,000명에서 최대 20,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정통성 없이 등장한, 국민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한 신군부는
시위대에 대한 무력진압으로 실추된 대외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89년 국가명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개정했습니다.
국가의 공식 명칭을 불법으로 정권을 탈취한 군부정권이 국민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바꾸어 버린거지요.
그래서 지금도 버마의 민주화운동가들과 버마의 민주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미얀마라는 국가명 대신 버마라는 국가명을 사용합니다.
군부에 의해 국민의 동의없이 대량학살의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국가명을 바꾼 것입니다.
미얀마는 그 이후 지금까지 군부가 철권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에도 유신 군부들의 통치가 막 끝나고 민주화 열망이 들어섰을 때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을 진압하면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들어선때 였습니다. 버마의 88년과 동일합니다. 한국은 어쩌면 그들과 비슷한 과정을 조금 먼저 겪으며 이제 민주화가 된 것 같습니다.
미얀마의 민주화를 이야기 하려면 수치여사를 언급해야 합니다.
1945년 미얀마 건국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장녀로 태어난 수치는 군부 독재가 이어지고 있던 1988년 영국의 생활을 청산하고 모친의 간호를 위해 귀국합니다. 그는 이후 야당인 국민민주연맹(NLD)의 총재로 취임한 뒤 1990년 총선에서 압승했지만, 군정은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그를 자택에 연금합니다. 그것이 20여년간 이어집니다. 노벨평화상위원회는 1991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비폭력 투쟁’에 대한 수치의 공로를 들어 그녀를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합니다. 그러나 미얀마 군부는 더욱 가혹한 압제를 계속하여 노벨상 수상식에 참여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군부도 더는 버티지 못하는지 2010년에 자택 연금을 풀게 됩니다. 그리고 수치여사는 올해 4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서며 그 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NLD가 압승을 거두며 드디어 정치 제도권에 진입하게 됩니다.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얀마로서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의미있는 사건입니다. 그 때 전 세계가 이 선거를 공정하게 치르도록 군사정부에 많은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유럽연합(EU),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이 참관하는 가운데 선거가 이루어집니다.
그런 수치여사가 몇 일전에 노벨상을 드디어 받았습니다. 21년만에 받은 것입니다.
노벨평화상위원회 위원장이 “세계를 변화시킨 역대 평화상 수상자를 대표하는 존재”라고 수치여사를 소개했습니다.
그녀는 21년 전 갇혀 있던 자신에게 노벨상 수상 소식이 줬던 의미에 대해 “억압받고 소외된 버마인들도 역시 세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당시는 나 스스로 그런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며 “노벨상은 내 마음에 새로운 문을 열었다”고 말했습니다. “연금시절, 내가 더 이상 현실 세계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지만 (평화상 수상은) 나에게 현실감각을 회복시켜 인류 사회로 이끌어냈고, 무엇보다 버마의 민주주의와 인권 투쟁에 대한 전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입니다.
또 수치여사는 이 자리에서 미얀마뿐 아니라 전세계의 양심수들이나 난민들과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잊혀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라며 억압받는 이들에게 큰 나라들의 ‘동정 불감증’(compassion fatigue)은 “이중의 고통”이 될 것이라고 관심을 호소합니다. (한겨레 2012 6/21)
미얀마가 향후 어찌될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얀마에 자유의 바람이 미얀마인들의 가슴속에 싹 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때, 저희가 미얀마에 갑니다.
저희가 미얀마를 간다고 결정할 때 까지도 보궐선거 결과가 안 나왔을 때였습니다.
이제 미얀마에 소망이 움트는 이즈음에 우리 청년들의 방문이 하나님이 맞추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숨죽여 살았던 미얀마인들을 아낌없이 사랑하고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사 우리는 이들을 알게 되고 기억하기 시작하지만 이들에 대한 기도와 소망을 늘 지니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합니다.
우리의 방문이 미얀마인들에게 예수 소망의 빛을 보는 계기가 되기를.
하나님이 주신 이 적합한 때에 방문하는 우리를 하나님이 돌보십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감당하도록.
모든 청년들이 건강하고 성령충만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박이삭 목사님을 비롯한 리더십에게 영적 지혜를 주셔서 잘 리드하시도록
모든 청년들이 싸우지 않고 화합과 감사의 마음으로 감당하도록.